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테쿰세 셔먼 (문단 편집) === 비판에 대한 반론 === J. 맥퍼슨(J. MacPherson)의 "Battle Cry of Freedom"을 읽어보면 이 주장이 틀렸다는 걸 알 수가 있다. '''공업생산력 및 제해권 문제는 개전 초기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남부의 골칫거리였지만, 지상에서 남군은 잘만 싸웠고 거의 링컨을 실각시키는데 성공할 뻔 했다.'''[* 1864년 대선에서 남부주들이 대부분 다 빠진 상태였는데도, 전체 득표수에서 40만표밖에 차이가 없었다. 선거인단 수로 보면 링컨의 압승이었지만, 북부 일부 주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아슬아슬한 경합주들이 되어 링컨도 진땀을 흘려야 했다.] 그러나 서부로의 진격의 예고편격인 애틀랜타 전투를 통해 남부주의 교통 및 물류의 거점으로서 보급을 책임지던 대도시 애틀랜타를 점령했고, 덕택에 북부주들에서 전쟁에 대한 지지가 매우 높아졌다. 이후 재선에 성공한걸 상기하면 이건 정치적으로 필요한 진격이었다. 특히, 서배너같은 경우 사실상 남부의 몇 안 되는 마지막 항구였고, 남군이 철도를 파괴하는 통에 보급이 부족했던 셔먼의 군대 입장에서는 항구로의 진격은 군사적으로도 필수적이었다. 물론, 여기에 남부의 후방을 휘저으면서 그랜트와 리가 대치하고 있는 동부전선을 흔들겠다는 계산도 깔려있었다.[* 이 때문에 탈영병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던 리의 군대에서 자신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탈영병이 속출한다.][* 이건 쓸 수 있는 병력과 자원이 한정되어 있던 남군이 실행했어야 했던 전략이다. 그런데 빅스버그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미시시피 강에 대한 통제권을 완벽히 상실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서 뒤치기가 불가능해졌고, 리는 그랜트에 발이 잡혀있었다.] 또한 셔먼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뒤쫓고 있었던 존스턴/후드 군대를 거꾸로 자신을 쫓게 만들어서 유리한 지형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